몇 해 전 부모님의 정기검진을 위해 서울강남성모병원을 찾았는데 휴게실 자판기에 고급커피와 일반커피가 구분되어 있었어요. 가격은 같았어요. 돈저냐는 몰라도 동그랑땡은 아는 것처럼, 결국 같은 걸 모르고 살아가듯 이것 또한 단순 표기 문제일까요.
< 목차 >
‘일반커피=고급커피’, ‘고급’의 차이는 가격 아니었나!
고급진 느낌 아니까 ‘돈저냐’ 말고 ‘동그랑땡’?
스폴리아띠네 글라시떼 (sfogliatine glassate) vs 누네띠네
마치며
‘일반커피=고급커피’, ‘고급’의 차이는 가격 아니었나!
‘일반커피는 400원, 고급커피도 400원?’
자판기를 보고 순간 멍해졌습니다. 고급이라면 대개 가격부터 일단 일반상품의 기준보다 높게 책정되고 보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잖아요.
‘일반화’와 ‘대중화’라는 말이 보편성을 지닌 것처럼, 고급화는 품질 면에서 더 우수해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만약 고급커피임에도 보편성 시도를 염두에 둔 판단이었다면 이 자판기 소유주는 꽤 자애로운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괜스레 웃음이 났습니다.
혹시 맛에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 두 잔을 뽑았습니다. 사실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냥 익숙한 밀크커피 맛이었죠. 그러니까 일반 밀크커피와 고급 밀크커피는 같은 커피인 셈이었습니다.
전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 사서 나오는, 테이크아웃보다 매장에서의 ‘핸드 드립 커피’를 머그잔에 마시는 걸 선호합니다. 고유의 향과 맛이 일회용 컵에 닿는 순간 잃는 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굳이 커피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노를 사 먹을 때와 핸드드립 커피를 사먹을 때는 엄연히 미세하게 다른 맛과 풍미를 이해하고 접근하는데요. 품질 좋은 커피콩을 최적의 온도에서 로스팅하여 바리스타의 전문 서비스가 더해지면 고급이라고 인정하기에 아메리카노와의 가격 차이를 수긍하곤 하죠.
노동의 현장이라면 어디든 극강의 에너지음료로 통하는 ‘믹스커피’도 좋아합니다. 한 번에 꼭 두 개씩 타서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데요. 아버지가 워낙 길다방(자판기) 마니아라 저도 가끔 건물 내 자판기에서 밀크커피나 설탕커피를 뽑아 맛을 봅니다.
이건 마실 때마다 일반적이면서 고급스러운 맛이 교차하는데요. 어쩌면 강남성모병원 내 자판기의 일반과 고급커피의 다르면서 같은 메뉴처럼 그때그때 마음상태가 혀의 감각까지 좌우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럴 땐 일반과 고급이 한 끗 차이랄까요.
고급진 느낌 아니까 ‘돈저냐’ 말고 ‘동그랑땡’?
돼지고기나 쇠고기와 같은 육류, 또는 생선 등을 잘 갈아서 두부나 호박, 쪽파, 청양고추 등 다진 채소와 섞고는 달걀을 입혀 둥글납작하게 기름에 지진 음식은 뭘까요?
명절, 생일, 잔치 등 시시때때로 우리 밥상에 오르는 ‘동그랑땡’ 맞습니다. 그런데 ‘돈저냐’는 무엇일까요? 사실 같은 음식인데요.
‘전(煎)’은 알아도 같은 말인 ‘저냐’는 모르고 ‘동그랑땡’은 알아도 역시나 같은 음식인 ‘돈저냐‘는 익숙하지 않을 때가 많죠.
이건 그저 생김새에서 따와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에도 좋아서 우리에게 친숙해진 나머지 본래의 명칭처럼 굳어버린 거라 일반과 고급의 차이를 논하기 그렇습니다. 저 역시 동그랑땡이 참 좋더라고요.
돈저냐 아니면 어떻습니까. 고기도 채소도 해물도 동그랗게 부쳐내기만 하면 동그랑땡으로 부르면 좋잖아요. 고급스럽고 비싸게 매길 음식으로 만들 이유 없는 이런 ’일반‘의 취급이 내가 사는 세계의 명사 같아서 마음 편합니다.
스폴리아띠네 글라시떼 (sfogliatine glassate) vs 누네띠네
과자 종류의 하나인 ’누네띠네‘ 아시죠? 얇고 바삭한 여러 겹의 누네띠네를 베어 물면 파사삭, 부서지면서 달콤한 것이 입안에 사르르 녹아들어 참 좋은데요.
누네띠네 원래 이름은 스폴리아띠네 글라시떼 (sfogliatine glassate)라고 하더라고요. 이탈리아 북부의 디저트로 알려졌다고 하는데 계속 손이 가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는 ’인간사료‘란 우스갯소리도 있더라고요. 암튼 본래 이름을 외우기는 참 어려워요.
우리나라에서는 ’눈에 띄네‘를 소리 나는 대로 한 ’누네띠네‘로 상품명을 지은 듯 보이는데요. 전 이게 귀에 쏙쏙 박히고 맛도 기억이 나서 좋더라고요.
과자 사러 갈때 스폴리아띠.. 글라시… ’스빠..시‘ 입안에 맴돌다가 결국 욕이나 연상되면서 과자는 기억이 안 나 살 것도 접고 말게 분명합니다.
비록 고급과는 거리에 먼 이름이라도 느낌만은 잘 아니까 뇌리에 남는 것들, 전 이런 게 바로 새우깡, 양파링, 고래밥처럼 친숙해서 좋은 브랜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젠 너무나 익숙해져서 밀크커피를 ’우유커피‘나 ’달달구리 커피‘라고 하진 않겠지만요.
일반음식점도 고급 한정식집 못지않은 맛난 음식이 있고, 파인다이닝이나 오마카세 간판을 달지 않았더라도 ’고급‘ 느낌 이상의 질로 승부를 거는 오랜 외관의 음식점들도 있죠.
극명하게 드러나서 비교되는 것 외에 후지고 고급스러워 보인다, 라는 것의 차이를 만드는 게 돈이 좌우할 때가 많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세련미가 떨어진다며 우리말을 너무 낮게 보는 분위기는 지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카페는 파는 음식과 음료 종류 대부분 영어로 표기한 곳이 많죠.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 이유인데요. ’있어보인다‘는 이유가 우리말이 ’없어 보인다‘와 동등한 의미가 돼서는 안 되잖아요.
불고기피자, 고구마피자가 없어 보이고 세련미가 떨어진다면, 갈릭피자, 포테이토 피자, 콤비네이션피자처럼 왜 영어로 바꿔 쓰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늘피자, 감자피자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중요하지요.
방탄소년단(BTS)과 뉴진스(Newjeans)의 우리말 노래를 전 세계 팬들이 따라 부르는데, 우리는 그것이 부끄럽던가요? 생각의 경계 역시 한 끗 차이 같습니다.
내 것이 남보다 더 못나 보이는 인식만 바꾼다면 저렴하더라도 소중한 게 많아질 겁니다. 보세라도 명품보다 나은 게 늘어날 겁니다. 일반이라도 고급 못잖게 맛있는 것들이 넘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자판기의 일반커피와 고급커피의 동등한 가격을 바라보며 기분에 따라 오늘은 일반커피를, 느낌에 따라 고급커피를 골라 마실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치며
오늘은 일반커피와 고급커피를 보며 그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돈저냐는 낯설어도 동그랑땡은 익숙하고 스폴리아띠네 글라시떼는 몰라도 누네띠네는 잘 알고 있듯이 내 머리와 정서에 가깝다면 전 그게 내 삶의 고급스러운 것들이라고 가치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