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로부터 인식되지 않은 존재는 잊히는 게 쉬울까요. 최근 제 이마에 붉은 꽃, 뾰루지가 피었는데, 문득 잊고 있던 존재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세수를 하다가 이마의 촉감에 깜짝 놀랐어요. 우둘투둘한 게 꼭 못 생긴 과일을 만지는 것 같았거든요.
거울을 보니 이마에 뾰루지 꽃이 잔뜩 피었어요. 자람의 푸르른 증표, 청소년기 여드름도 이만큼 피부를 잠식한 적이 없었는데 이마 전체를 덮은 붉은 꽃에 웬일인가 싶었어요.
이마가 이 모양이 된 건 아마도 수건에 남은 잔류 세제 때문인 것 같아요.
며칠 전 수건을 넣고 세탁기를 돌렸어요. 헹굼 횟수가 적은 나머지 잔류 세제가 남았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말린 수건은 건강한 수건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녁에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잘 감싼 채 방과 거실 청소를 했습니다. 청소기를 돌린 뒤 물걸레 청소까지 마쳤는데요.
그동안 흙막이 포장처럼 머리를 감싸고 있던 수건의 한 끝이 자연스레 이마 쪽에 닿아 있었어요.
딱 그 지점! 수건과 접촉한 면에 매우 잘 자라는 식물의 생장처럼 뾰루지가 흐드러진 거예요.
수건을 위해 쓴 세제는 충분한 시간과 여유 있는 물로써 다루어야 사람 몸에도 뒤탈이 안 나요.
아이들이 세탁세제와 섬유유연제 때문에 아토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해요.
이걸 몰랐던 부모는 옷과 수건의 잔류 세제 성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였던 거죠.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을 들이는 것은 정성이 견고해서 뒤탈이 나기 쉽지 않아요. 조급해서 결과를 빨리 보려고 하면 삶에 좋지 않은 자극이 올 때가 있더라고요.
유명한 선짓국 집에서는 센 불로 선지를 익히지 않아요. 뭉근한 온도의 불로 익혀야 선지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리지 않는 법이거든요.
덥고 땀이 나는 작업이지만 그렇게 공을 들여야만 제대로 된 선짓국이 완성된다는 걸 터득한 지혜이지요.
평소 빨랫감에 맞게 세제를 적당히 넣고 헹굴 때는 꼭 세 번 정도는 기본으로 하려고 해요.
세제를 많이 넣는다고 해서 세탁물이 잘 빨리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전 강력한 세제에 대한 믿음보다 화학제품 사용으로 인한 자극과 부작용을 더 우려하는 사람인데요.
이런 제가 이마에 화농성 여드름 같은 꽃을 잔뜩 피웠단 사실에 조급함이 앞섰나, 싶어서 매우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떠오른 나
문득 ‘나’라는 존재에 관해 생각해 봐요.
거울 안에 온전히 전신이 확인되는 순간, 나의 전체구나,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어요.
사춘기 시절, 외모와 목소리 등 내 신체적인 특징이 외부로 드러날 때, 남들과 교류를 통해 특정되는 나 자신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란 존재가 마치 남인 듯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거죠.
낯선 나라는 존재에 의식의 거리를 띄운 채 얼굴과 몸에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고, 편안한 크기의 신발을 신을 때면 손에 잡히는 양감이 그렇게 새삼스러웠어요.
머리카락 길이가 길어지고 키가 자라며 이름이 거듭 불리는 순간이 올 때 이게 나구나, 존재감을 자연의 순리처럼 각인하게 됐어요.
이마의 붉은 꽃은 그 시절에 이어 성인이 된 지금 다시 한 번 나에 대한 어색한 인식을 끄집어냈어요.
표류하듯 시간에 기댄 채 살아온 삶은 아니었나, 오늘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봐요.
고민을 깊이 하기에 어색하고 둔감한 사람이 되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뭔가 달라진 게 있어요.
암 선고를 받은 지인들이 있어요.
부인과 질환으로 수술을 한 사람도 있고요. 생사를 오간 나머지 병원과 소송 중인 사람이 있으며, 질병을 완치해서 건강관리에 신경 쓰는 사람도 있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이제 진짜 원하는 거 하고 살아야겠다, 라는 다짐을 쏟아내요.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다는 계획 말고, 내가 진짜 원하는 거 하면서 행복을 찾겠다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거죠.
아파보니 내가 보이더라, 는 이야기가 바로 옆에서 그렇게 종종 들려와요.
꽃이 피면 지는 게 그렇게 아쉬운데요. 전 이마가 넓어서 앞머리를 내리고 다니는데, 이마의 붉은 꽃은 제발 잘 지라고 훤히 드러냈어요.
바람이 잘 통해야 염증이 가라앉는다고 하잖아요.
그 말을 떠올리며 손끝으로 뾰루지를 낯설게 살살 건드려 봅니다. 거울을 요리조리 보다 보니 새삼 낯설기만 한 얼굴이에요.
이마의 윗부분에 주름 두 줄이 생긴 게 보입니다. 늙어가는구나…
내일 걱정만 가득한 제가 이마의 뾰루지를 보니 주름이 보이고 오늘도 보여요.
탄력은 떨어져가도 별 문제 없던 피부에 뾰루지 좀 덮여서 가렵다고 그렇게 내가 보여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
삶의 정체된 지점이 잘 풀리는 것 같지는 않아서 아쉬움과 답답함이 생기는 날 있잖아요. 그럴 때 어디선가 불어올 바람을 기다리죠.
현재를 환기해서 나은 내일로 이끌 바람.
남들보다 고요하게 사는 삶은 이름 없는 것들 중 하나의 생존 같을 때가 있어요.
어쩌면 누군가에게 인식되지 않는 삶은 잊히는 것도 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그렇게 보통이기만 한 나날 중에 꽃이 피면 비록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것에 자연스레 시선이 가잖아요.
이마를 손끝 마디로 문지지다, 손톱으로 살짝 긁다가 마음에 시선을 둬보아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
정답은 모르지만 내면에 가까워지려는 마음가짐. 오늘 그것을 해요.
나의 가렵고 불편한 오늘의 지점을 위무하면서도 나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순간만큼은 지구상에서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그 순간만큼은 시간에 표류하지 않는 사람인 건 아닐까.
고요한 영역의 이름 없는 것들 중 하나 같은 삶이라도, 지구와 동떨어진 별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오늘의 나라도 이마의 뾰루지처럼 보고 또 보아요.
이마에 붉은 꽃이 피었어도, 무심히 이마에 쏟아버린 그 조급함을 닦아내며 그렇게 나를 보아요.
그럼 피어나서 어여쁜 꽃을 기다리기 위해 오늘의 뭔가를 일구고 싶은 마음이 생길 거라고 믿으면서요.